매미 소리가 감도는 여름의 초입이자 꽃잎이 마르는 봄의 끝이었다. 리사는 초조해지는 기분에 발을 스윽 한 번 밀었다. 분홍이
발끝에서 부서지며 모래알 사이로 스몄다. 공고문이 걸린 게시판엔 아직도 마른 벚꽃잎이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좀 멀지 않나. 그래도 프랑스어 수업이 있는 학교는 정말 드문데, 무사시노 정도면 정말 어디냐 싶지만.'
아리요시 리사는 불어불문과의 프랑스어 교사 과정을 밟고 있었고 올 봄 교생실습을 나간다. 외국어 고등학교도 아닌데 프랑스어 수업이
있는 학교는 드물었고, 하마터면 학기를 연장해야 할 뻔 했으나 결국 결정이 났으니 대단히 다행인 일이었다.
"어디보자, 시즈루랑 같이 나가는 거야? 교생실습."
"너 알아? 이 가나하 시즈루라는 애."
같이 공고를 보러 왔던 친구가 리사의 이름과 해당 학교를 확인하더니 그렇게 말했다. 무사시노 고교는 대학에서 거리가 제법 있는
학교라, 교생으로 나가는 사람은 그 둘 밖에 없었다. 지역 학교마다 칸이 좁도록 빼곡이 적혀있는 이름들 사이 달랑 둘의 이름은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착해. 애가 수더분하고. 시즈루는 유아교육과니까 교생을 나가도 많이 만날 일은 없겠지만."
말꼬리를 흐리던 친구가 문득 키타가와 이야기를 꺼냈다.
"너도 학교가 키타가와였던 것 같은데."
"중학교? 응. 키타가와 제1 중학교 다녔는데."
"시즈루도 거기야. 내내 같은 학교 다니면서 여지껏 모르는 사이였어?"
마스카라로 공들여 바짝 올린 리사의 속눈썹이 두어 번 깜빡였다. 학교를 두 개 건너 이제는 대학생이었다. 기억날 리가 없었다.
"가나하 시즈루 양?"
말간 눈동자가 이 편을 향했다. 속눈썹의 그림자가 흰 얼굴 위로 드리는 것이 보일 것 같았다. 솜사탕같이 부들부들하고 녹아서
흩어질 것 같은, 연하고 따뜻한 색채의 여자애. 리사가 저와 같이 외딴 학교로 떨어진 대학교 동기에 대해 친구에게 물어봤을 때
상상하던 모습이었다. 말만 들어도 그랬고 실제로 봤을 땐 예상대로였다.
도자기로 만든 인형 같았다, 그 애는. 작고 세심한 흰 손 위로 조약돌 같은 분홍색 손톱이 귀엽게 얹어져 있었다. 석고로 만든 듯한 손가락들은 서로 부딪혀도 영롱한 소리가 나지는 않는다.
"아까 조회시간 때 들었겠지만 이번에 같이 교생실습을 나가게 됐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잘 부탁해."
"아리요시...양이지?"
"어, 나 알고 있어?"
"모모카 양이랑 함께 다니는, 친구. 교내에서 가끔 봤어."
"그래..."
리사는 시즈루를 모르는데 시즈루는 리사를 알고 있었다니. 좀 민망했다. 평소에 더 주변에 관심을 기울일 걸 그랬나 싶어서.
"난 프랑스어 수업이 있는 학교가 여기밖에 없어서 이쪽에 배정됐어. 가나하 양은 더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어?"
"응. 다른 친구들은 좀 더 가까운 유치원에 배정됐어."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그 애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그게, 인원이 넘쳐서 나만 따로. 펄 섀도우를 바른 눈에 햇빛이 비쳐 리사의 시야가 반짝거렸다.
눈부심에 잠시 눈을 감으며 리사는 그 연분홍 손톱 끝에 봄의 마지막이 머물고 있는 것 같다는, 답지 않게 감상적인 생각을 했다.
그런 느낌이었다, 가나하 시즈루의 첫 인상은. 하늘하늘하고, 마른 꽃잎이 날리는 것 같은 따뜻한 어느 봄날 같은 여자애.
중학교가 같다고 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시즈루와 친해지는 건 좀 더 쉬웠다. 왜 그 때, 개학하자마자 폭설로 급식이 끊겨서
조달해 먹느라 고생이었잖아. 기억나니? 무사시노 고도 얼마 전에 그랬대. 같은 얘기들이 몇 번 오가자 맞춰지는 추억의 조각 속에
서로가 정말로 같은 타임라인 속에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나하 시즈루, 가나하 시즈루.'
입에서 이름을 굴려보자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중학 시절 얘기를 잠시 주고받아서 그런가 처음과 달리 점점 중학교 다닐 때 몇 번 들었던 이름이 아닌가, 슬슬 착각하기 시작할 정도였다.
하교는 리사가 먼저였다. 유치원은 본교보다 운영 시간이 길어서 퇴근이 늦었다. 그렇다고 해도 실습을 나온 교생을 오래 붙잡아
두지는 않을 거라서, 리사가 기다려 줄까? 라고 물었으나 시즈루는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있다고 고개를 저었다. 고갯짓에서
전해오는 수줍음에 리사가 몰래 웃었다. 아마 남자 친구겠구나.
교문 앞에 그림자가 길었다. 누굴 기다리는 지 교문 앞에 기대 선 남자는 자전거 벨을 툭 울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키가 참 크네. 그렇게 생각하다가 눈에 익은 얼굴에 리사는 무심코 눈을 가늘게 떴다.
"쿠니미 아키라?"
좀 더 키가 커지고, 몸집이 두꺼워지고, 햇볕에 보낸 시간만큼 얼굴이 탔지만 단번에 기억 속 그 애였다. 세월이 지났지만 기억
속의 그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세월이 출렁였다. 키타가와 중학시절, 같은 반의 학급위원이었던 자신, 배구부원이었던 그
애.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상대가 반사적으로 이 편을 보았다가 곧 무심한 얼굴이 되었다.
"왜 여기에...아, 나. 너랑 같이 키타가와 나왔던...그...기억해? 여기는 교생으로 왔는데."
얼떨떨한 기분에 말이 이것저것 튀어나왔다. 두서없는 말 중에서 쿠니미는 관심 있는 단어만 골라서 집었다.
"이제 교생실습이 끝날 시간입니까?"
아, 굵다.
기억보다 깊고 성숙해진 목소리였다. 중학교 때 이미 쿠니미 아키라의 목소리는 변성기에 접어들었었지만 그때는 웃자란 어색함이 있었다. 완연한 성인의 목소리가 된 남자의 목소리는 정중하고 울림이 듣기 좋았다.
"응...고등학교 교생들은 모두 끝났어. 유치원은 아직 남았지만."
유치원 교생은 아직 남아있다는 말에 쿠니미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누구를 만나러 온 건지 알 것 같았다.
쿠니미 아키라와는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고 리사는 한때 쿠니미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때는 모두가 운동하는 남자친구가 멋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배구부가 유명하던 학교였다. 주변 여자애들이 오이카와 선배에게 열광할 때 리사는 경쟁률이 낮은 틈새시장을
노려보았으나 쿠니미 쪽이 더 힘든 길이었다는 걸 안 건 나중이었다.
학급위원이라서, 숙제 같이 하는 조니까. 연락 좀 하게 번호 좀 줄래? 라고 새침하게 몇 번 말을 걸었는데 그 애는 번번이 못
들은 척 굴었다. 무심한 운동부 남자애라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속 끓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되는 거절에 리사도 곧 흥미가
떨어졌다. 학기 중반이 되어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여자애들끼리 도란도란 같은 반 남자애들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쿠니미 아키라에
이르러서는 "리사, 학기 초에 쿠니미 좋아하지 않았어?" "그랬었어? 운동부 남자애가 좋으면 다른 학교라도 소개팅 시켜줄까?"라는
말을 듣고 좋아한 적 없다고 발끈했었지만. 중학교 시절이야 이제 아무래도 좋아진 지금 쿠니미 아키라는 조금 관심이 있었지만
어려웠던 남자애였다.
"저기, 나 기억 안 나? 키타가와 제 1 중학교. 너랑 같은 반이었고 학급위원이었는데. 가나하 양 만나러 온 거야?"
다시 만난 게 7년만인가 8년만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리사는 중학교 졸업식장 이후 정확히 얼마 만에 만났는지 계절마저 기억할 수 있었지만 자존심에 모호하게 기억하는 척을 했다. 계속되는 질문에 쿠니미가 귀찮은 듯이 대답해줬다.
"기억 나."
그리고 짧게 덧붙였다.
"시즈루, 알아?"
그때는 얻기 어려웠던 쿠니미의 전화번호를 이번에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쿠니미가 교생에 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하려는 용도였겠지만, 어쨌든 기뻤다.
"쿠니미?"
하늘하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떨어졌다.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고 파르르 떨리는 나비 날갯짓처럼 가냘픈 울림이 있는 목소리.
순간이었다. 치켜 올라갔던 눈썹 끝이 둥글어지고, 뙤약볕 아래 땀이 고이던 그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진 것은.
"수업 끝났어, 시즈루?"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쿠니미가 왔다고 하길래... 더우니까 다른 데서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정식 교사도 아닌데 너무 고생하는 거 아니야? 사람이 그렇게 모자라?"
앞서 나간 쿠니미의 등에 리사가 가려졌다. 쿠니미의 뒤에 서서 리사는 둘을 신기한 기분으로 보았다. 저기만 세계가 다른 것
같았다. 그곳은 봄도 아니고,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의 사이에 선 곳도 아니었다. 선을 긋던 무심한 분위기가 시즈루가
나타난 뒤로 확 달라졌다. 왜 이렇게 일을 많이 시키냐고 불만 가득한 내용을 말하면서도 둘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쿠니미 있지, 리사 양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쿠니미랑 아는 사이야?"
"아니, 몰라."
한번 돌아보지도 않고 쿠니미가 거짓말을 했다. 기억난다고 했으면서.
쿠니미 아키라는 그 후로도 종종 무사시노로 와서 시즈루의 하교를 기다렸다. 종종이라기에는 거의 매일에 가까웠지만. 시즈루와 리사의
모교도 무사시노에서 먼 편이었고, 그들이 사는 동네 자체가 무사시노에서 먼 곳이었다. 쿠니미의 대학교도 이 고등학교에서 멀지
않아? 가깝지도 않은 데 어떻게 오는 거야? 라고 한번쯤 물어봤을 때 쿠니미는 짤막하게 4학년 수업은 별로 들을 게 없어. 라고
대답했다. 그래도 이 시간에 매일 여기까지 오려면 원하는 수업 한 두개는 포기하지 않았을 게 아니냐고, 말하려다 지나친 참견 같아
말하지 않았다.
쿠니미 아키라가 리사 말고도 다른 여자애들에게 무심하게 구는 것에 대해 암암리에 몇 반에 여자 친구가 있어서라는 소문이 돌았었던
적이 있었다. 그 여자애와는 소꿉친구라고도 했고, 배구부에서 누가 둘이 말하는 걸 봤다고도 했고, 조용조용하고 차분한 애라더라
하고 제법 구체적으로 소문이 돌았으나, 확정적으로 쿠니미의 입에서 여자 친구가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사귀는구나.'
리사의 시선 저 아래에 햇살이 고이는 동그란 머리통이 있었다. 가나하 시즈루였다. 선생님을 대신해 수업을 가르치고 있으면 창문
밖에서 가나하 시즈루가 아이들을 이끌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것이 종종 보였다. 임시 선생님이니까 그런 일이 자주 없었을 텐데도 그
모습은 마음속에 깊게 남았다. 시즈루가 아이들의 말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오리떼를 이끌 듯 운동장을 한 차례 도는 게, 사람의
마음에 어떤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지 않을까.
교생 생활도 이제 거의 막바지였다. 과거의 동창들을 만난 것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리사는 교생 기간 동안 시즈루와 친해졌고, 쿠니미 아키라와는 중학교 시절보다 많은 말을 했다. 아침의 교무회의도 이제는 익숙했다.
"오늘 공문 다들 보셨죠? 최근 현내에 치한이 설친다고 하니 교내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선생님들께서는 각별히 주의 바랍니다."
"하하. 무사시노 고는 남고잖아요? 누가 이 시커먼 남자애들 보러 여기까지 오겠어요. 하지만 여고 선생님들은 확실히 큰일이겠네요."
"우리도 그렇게까지 남일은 아니에요. 요즘은 몰카라던가, 나쁜 게 판쳐서 우리 애들이 못된 호기심에 가해자가 될까 걱정이잖습니까."
부장 선생님은 치한에 대해 각별한 주의를 부탁했지만 말하는 본인부터도 그렇게 진지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남자 공립 고등학교인
무사시노 고는 차라리 가방에서 야한 도색 잡지가 발견되는 게 문제였지, 치한이 원정을 나오는 학교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다들 깜빡 잊고 있었다. 무사시노 고에는 부설 유치원이 있고, 유치원에는 “어머니가 바빠서 대신 왔어. 나랑 같이 엄마 만나러 갈까?” 하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걸.
가나하 시즈루가 다쳤다는 소리를 들은 것은 그 날 오후였다. 현역 프랑스어 선생님의 수업을 참관하던 중 리사는 그녀를 급하게 찾는
부장 선생님 손에 이끌려 교무실로 갔다. 수상한 사람도 수상한 사람이고, 피해자가 교생인 것도 문제였다. 교생이라고 해도
학생이었다. 타 학교에서 교육실습을 위탁받은 학생이 위험한 일에 휘말렸으니 학교 행정실은 당황한 분위기가 가득했다.
시즈루는 그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했다. 유아 화장실을 어슬렁거리는 수상한 사람을 시즈루가 수상하게 여겨, 잡았으나 범인은
유치원 어린이의 친척이라고 우겼다고 했다. 하지만 설령 친척이라고 해도 화장실 근처에서 어슬렁거릴 이유는 없다. 그렇게 판단한
시즈루가 유치원 교무실로 같이 가달라고 했으나 시즈루를 밀치고 달아나려다 붙잡혔다는 모양이었다. 일단은 놀랐을까봐 양호실로
보냈으나, 진정되고 나면 피해자이자 증인으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할 거라고 했다.
"가나하."
이불 속에 폭 감겨 있던 머리가 제 이름에 움찔 움직였다. 커튼이 내려진 양호실 안, 밖은 밝았지만 실내는 어두웠고 가나하는 어둠 속에서 더욱 작게 느껴졌다. 이불 밖으로 삐죽 나온 마른 팔다리에 밴드가 붙여져 있는 게 보였다.
"많이 놀랬지. 오늘 큰 일이 있었다고 들었어."
시즈루의 몸에 겉보기에 큰 상처는 없어보였다. 평소보다 핏기 없어 보이는 얼굴만이 그 애가 오늘 겪은 일을 말해주었다.
리사는 위로를 표하면서도 너무 목소리를 높이지 않게 조심했다. 끝난 일이었다. 괜한 호들갑으로 가뜩이나 놀랐을 시즈루의 불안을 자극하면 안되었다.
"어떡하지."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한다면 경찰 조사 같은 건 며칠 미뤘다가 받아도 된대. 학교에서 신경 쓰지 못해줘서 미안하다고, 나머지 교생 기간은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나오지 않아도 좋다고..."
"...쿠니미한테 문자를 못 했어."
"문자?"
"쿠니미랑 연락 중이었는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가 화장실에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답장을 못 했어.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불안과 어두움이 시즈루의 얼굴에 내렸다.
"걱정할 텐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걱정 끼치기 싫은데."
하늘을 비치는 큰 창 같던 그 애의 눈에 구름과 비가 차올랐다. 운무(雲霧)는 눈 안쪽에 고인 그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시즈루는 슬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슬퍼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기 몸부터 챙겨야지. 네가 이렇게 걱정하는 걸 알면 쿠니미가 그것 때문에 더 속상할거야.”
시즈루가 다친 것을 걱정하는 쿠니미. 자기가 다친 것 때문에 마음이 쓰일 쿠니미를 걱정하는 시즈루. 그리고 다시 몸도 챙기지 않고
자기가 걱정할 걸 걱정하는 시즈루 때문에 속을 끓일 쿠니미. 걱정의 사이클이 끊기지 않는 이상한 관계다, 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리사는 뭉클했다.
“그치만…….”
“쿠니미 군이 평소 이 시간쯤에 오지? 밖에서 내가 먼저 만나면 놀라지 않게 미리 설명해 둘게. 그래도 내가 먼저 말하면 나중에 만났을 때 덜 놀라지 않을까?”
잠시 호흡을 가다듬던 시즈루가 고개를 떨구며 그러는 게 좋겠다고 허락했다.
나가기 전 병실을 돌아봤을 때 시즈루는 이불 뭉치를 들고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어디쯤, 쿠니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는 걸까. 어둠 속에서 새어나오는 한 줄기 빛을 찾듯 그 시선은 간절하게 밖을 헤매고 있었다.
아아, 누가 저 애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토록 지켜주고 싶고 또 좋은 것만 주고 싶은 아이를.
“형, 유치원 선생님 남자친구 맞죠?”
“…….”
호기심으로 다가온 듯한 고등학생 무리를 쿠니미는 쓱 보고 무시했다. 흥미 본위로 다가온 생면부지의 녀석들에게 할 말은 없었다.
“형, 형. 아 왜 대답이 없어, 이 형은.”
“형이라고 불러서 싫은 건가? 형도 뭐, 여자 친구 선생님처럼 교사 준비생?”
이 더운 날에 덤비는 파리떼와 저 남고생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시커멓다는 것과 앵앵거린다는 점이었다. 견디기도 다 귀찮아서 그만 가라고 으름장을 놓을까, 슬슬 헤아려 보던 참이었는데.
“여기 있어도 되는 거예요? 오늘 유치원 쪽 큰 일 있었는데. 기다려도 안 나올지 몰라요, 그 대학생 선생님.”
쿠니미의 심장이 고장 나 버린 것 같았다. 누군가 심장의 태엽을 빨리 감은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리사는 하마터면 쿠니미를 놓칠 뻔했었다. 앞도 뒤도 보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가던 쿠니미와 부딪히지 않은 게 용했다. “시, 신원불명의 사람은 교내출입 금지야!” 라는 말은 또 무슨 생각으로 한 건지.
“시즈루는 어디에 있어.”
“잠깐만, 잠깐만 진정하자……하아, 하. 너……잡겠다고 뛰어서……숨이.”
“너 숨 쉬는 거 기다려 줄 여유 같은 거 없어. 시즈루는 어디에 있는 건데?”
“내가, 아까……방, 방금 전에 봤는데……괜찮아, 시즈루……무사해……그러니.”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안심 못 해.”
“너 지금 표정 무섭단 말이야!”
쿠니미는 울컥했다가 이내 한 방 먹은 표정이 되어 얼굴을 몇 번 쓸어내렸다. 형언할 수 없는 초조함이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안 그래도 지금 시즈루 놀랐을 텐데 그런 얼굴이면 더 속상해 할 거야. 그러니까 조심히 대하라고.”
대답 없이 쿠니미가 근처의 나무를 주먹으로 쳤다. 못내 분한 모양이었다. 그런 위험에 처하게 한 자신도, 표정관리가 안 돼는 자신도. 리사가 한숨을 쉬었다. ‘가지가지 한다. 시즈루는 너 그러는 거 아니?’
“그래 쳐라, 쳐. 그거 학교기념물인데 치는 거 눈감아 주는 대신 시즈루 앞에서 표정관리는 하고 들어가는 거다.”
“시즈루 앞에선 얌전히 있을 테니까 어디 있는 지나 말해.”
“구교사 쪽 양호실. 너 나 안 만났으면 완전히 잘못된 대로 갔을걸. 그 전에 경비 아저씨나 안 만났으면 다행이었다.”
“앞장 서.”
본인이 구교사가 어딘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보니 정말로 이성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리사는 보지 못했다.
쿠니미가 가린 팔뚝 안쪽에서 미친듯이 펄떡이는 굵은 동맥을,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그리고 꽉 쥐다 못해 손톱자국이 꾹꾹 난
손바닥 안을.
커튼을 친 사각의 방 안은 고요히 침묵에 잠겨 있었고 창문을 흔드는 바람 하나 들이닥치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면 먼 곳에서
아이들이 활기차게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그것은 먼 곳의 일이었고 시즈루는 이곳에서 안정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리사에게 전달받은 대로라면 학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좋았다. 귀여운 아이들의 목소리가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도 곧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고요히 가라앉을 때까지, 모든 충격과 자극이 수면 아래로 잠잠히 가라앉아 원래의
그녀의 소박하고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원래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손에 쥔 휴대폰 액정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시즈루, 교생실습 생활은 어때?」
「누군가 괴롭힌다면 혼내줄 테니까 얼른 말해.」
「졸업이라 배구부 연습 그만 뒀더니, 후배들이 지도해 달라고 찾아와서 귀찮아. 자기들끼리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시즈루?」
특별할 것 없는 말들이지만 가나하 시즈루에게는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는 소중한 말들. 처음 문자를 시작한 날부터 오늘 대답하지
못한 문자에 이르기까지 쿠니미와의 대화는 모두 보관함에 저장해 두었다.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도록. 항상 곁에서, 빛을 내줄 수
있도록.
꾹 쥐어서 손이 따뜻해지는 것은 휴대폰의 열 때문이 아니다. 쿠니미의 말들이 모두 빛나는 것은 전자기기에 적혀 있는 말이어서가 아니다.
‘쿠니미의 말은, 쿠니미의 존재는 나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힘을 주는 존재였으니까.’
쿠니미, 네가 있어서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이제 더 이상 네가 먼저 손잡아 오기를 기다리지 않아. 그러니까 지금도 일어설 수 있어.
시즈루가 작은 한숨과 함께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직접 쿠니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다른
누구의 입을 빌려서가 아니라, 그녀가 직접. 놀랐지만 별 것 아니었다는 말도 함께. 그리고 마지막엔 웃으면서.
‘평소 오는 대로였다면 교문 앞에서 기다리겠지만, 리사가 마중 나갔다면 이쪽으로 오고 있을 텐데. 길을 잘못 정하면 엇갈릴 것 같아.’
나무가 많은 무사시노 고의 길은 한번 엇갈리면 상대방을 찾기가 힘들었다. 첫발을 신중하게 떼지 않으면 또 한 번 소란을 겪을 것 같은 예감에, 시즈루가 구교사 동에서 섣불리 발을 못 떼고 있을 때였다.
“이봐!”
“히익!”
팔이 붙잡혔다.
처음에는 모르는 상대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다. 몇 시간 전에 봤던 얼굴이다. 아까, 유치원 화장실에서.
어째서? 상대방은 분명히 붙잡혔는데. 자신과 분리되어서 이제 볼 일 없다고 그랬었는데.
“아가씨, 증언을 해 줘. 아가씨가 오해한 거라고. 나는 나쁜 의도가 없었다니까. 그런데 아가씨가 이상하게 말을 하는 바람에…….”
“……아, 아아……아!”
비명이라도, 질러야 해. 아까 전에 그랬던 것처럼. 위급한 걸 알려야, 알리면……그러면 다른 사람이 분명.
순간 기분 나쁜 숨이 얼굴에 훅 끼쳤다.
“아가씨! 듣고 있는 거야? 아가씨 때문에 곤란에 처했다니까! 젊은 사람이 뭐가 그렇게 매정해, 응?”
상대방이 난폭하게 어깨를 흔든다.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흔들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 소리가 나오려 하다가도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질겁해 먹어버렸다.
‘누군가, 누군가…….’
떨리는 눈동자를 굴려 좌우를 훑어 봐도 고요한 구교사 동은 아무도 이 위기를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까지 이 사람과 대치해야 하는 걸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가씨!”
‘……쿠, 니미…….’
신처럼 누군가를 찾던 중얼거림은 결국 쿠니미로 끝난다.
미안해 쿠니미. 네가 있는 세계를 내 눈으로 보고 싶으니까, 더 이상은 눈 감지 않으려 했는데. 그치만 지금은 무서우니까, 잠시만. 조금만. 외면할게.
“시즈루!”
“크어어억!”
감기던 눈이 번쩍 뜨였다. 퍼억 퍽, 악몽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당황해 크게 뜨인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든든한 쿠니미 아키라와, 나동그라진 사람.
“쿠니미……?”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사람을 다짜고짜 패면……아무튼 아저씬 뭔데 애를 흔들어요? 그러니까 엄한 놈한테 맞고 다니죠!”
“시즈루,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가 있으니까 안심해.”
잠시 일시 정지 화면을 눌러놓은 것 같았던 세상이 바쁘게 돌아간다. 얻어맞은 사람이 꽥꽥대는 소리, 뒤늦게 달려온 리사가 수습하는 소리, 그리고 자신을 품에 안은 쿠니미가 안심시키는 목소리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널 안 좋은 상황에 처하게 하지는 않을 거야.”
단단한 확언과 자신을 감싸 안은 팔에 꾹 들어간 힘에 눈이 젖어들었다. 시즈루의 세계는 언제나 쿠니미로부터 시작된다. 눈앞의 쿠니미를 보자 안정이 찾아왔다.
“방금 전에 쿠니미가 너무 보고 싶었는데……눈을 뜨니까 신이 기도를 들어주신 것처럼 쿠니미가 있어서…….”
“미안해, 내가 늦어서.”
“아니야……쿠니미는 언제나 제일 보고 싶을 때 왔어.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걸.”
부둥켜안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연인에게 속삭인다. 코 속 가득 쿠니미 아키라의 체취가 있어서, 눈을 뜨고 어딜 봐도 쿠니미 아키라의 품속이라 시즈루는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쉬어도 될 것만 같아서.
꼭 끌어안은 한 쌍의 머리 위로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계절은 여름, 교생실습이 끝나갈 무렵이었다.